2021. 2. 19. 13:55ㆍ식물이야기
1. 사탕수수
값싼 정제당을 쉽게 사용할 수 없던 오래전부터 인간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단 맛을 찾아냈습니다. 그렇게 찾은 당은 식물과 동물 어디에나 있습니다. 설탕의 ‘당’인 자당이 특히 풍부한 것은 사탕수수입니다. 볏과에 속하는 사탕수수는 뉴기니에서 처음 경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록 교배가 쉬운 다른 속이었고, 그 야생 원종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대나무처럼 속이 비어 있는 많은 줄기들과 달리, 사탕수수 줄기의 중심은 섬유질로 되어 있으며 사탕수수 즙은 약 17퍼센트의 자당을 함유합니다. 이 기쁜 사실이 발견된 것은 오래전이었습니다. 기원전 훨씬 이전에 태평양 제도에서는 사탕수수를 씹었고 인도와 중국에서는 사탕수수를 재배했습니다. 서기 1세기 초반에 집필 활동을 했던 그리스의 지리학자이자 역사학자 스트라보는 일찍이 벌 없이도 ‘꿀을 생산하는 갈대’에 대한 설명을 반복합니다.
고체 설탕을 만들기 위해 사탕수수 수액을 추출하고 졸이는 과정은 고대에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인도인들은 정제되지 않은 이 갈색의 고체 설탕을 ‘재거리’라고 불렀습니다. 서기 7세기 무렵 페르시아인들은 석회를 넣으면 재거리가 흰색이 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랍인들은 서남아시아 전역, 북아프리카, 지중해 몇몇 섬에 대체로 관개시설을 둔 설탕 농장을 설립했습니다. 설탕은 매우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서 유럽으로 서서히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과당으로 이루어진 꿀은 계속해서 주요 감미료로 사용되었습니다.
사탕수수는 열대 식물로 강수량과 일조량이 풍부한 비옥한 땅에서 잘 자랍니다. 어떤 것은 6미터까지 자랄 수도 있습니다. 사치품에 대한 유럽인들의 기호가 증가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의 국가들이 마데이라 제도와 카나리아 제도에 농장을 설립했습니다. 콜럼버스는 자신의 두 번째 신대륙 항해에 사탕수수를 가져갔으며, 이를 통해 카리브해 섬들이 알맞은 경작지임이 드러났습니다. 설탕은 생산하는 데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으므로 가격이 비쌌습니다. 억센 줄기는 뿌리 근처를 잘라줘야 했고, 잎은 껍질을 벗긴 즉시 으깨야 했으며, 즙은 끓여서 여과를 거친 다음 또 다시 끓여야 했습니다. 심고 수확하는 것도 몹시 고된 작업이었습니다. 사탕수수는 마디 하나만큼을 도랑이나 구멍 하나에 심었을 때 가장 잘 자랍니다. 사탕수수 밭은 강수량이 충분하지 않을 때 제초와 관개가 필수이며, 가공 역시 쉬운 일이 아니고 많은 연료가 필요했습니다. 마데이라 제도는 사탕수수 재배와 생산으로 광범위한 규모의 산림이 파괴되었습니다.
17세기 유럽에 차, 커피, 초콜릿이 들어오면서 설탕에 대한 수요도 현저히 증가했습니다. 바베이도스, 자메이카, 브라질 및 신대륙의 다른 지역에 있는 농장에서 일할 인력도 필요했습니다. 고용 계약에 의한 노동 구조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입증되었고, 아프리카 노예는 끔찍한 해결책이 되었습니다. 1662년부터 영국의 노예무역이 폐지된 1807년까지, 약 3백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비위생적이고 비좁은 배로 수송되었습니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미국인들 역시 미국 루이지애나뿐 아니라 브라질과 다른 식민지에 있는 설탕 농장을 위해 적극적인 노예 수송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간 항로로 알려진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까지의 항해는 삼각 항로의 일부였습니다. 배들은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노예와 교환할 물품을 가득 싣고 리버풀, 런던, 브리스틀로 떠났습니다. 대서양을 가로질러 농장까지 노예 수송을 마친 배들은 귀중한 화물을 싣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아프리카의 노예 상인들은 아프리카 내륙에서 불운한 희생양들을 노예로 붙잡았는데, 대부분 남성이었지만 여성과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생존율은 항해에 따라 가변적이었지만, 형편없고 부족한 식량에 비좁고 비인간적인 환경으로 상황은 늘 열악했습니다.
사탕수수 재배 방법의 개선으로 농장의 환경은 점차 나아졌습니다. 사탕수수는 크기가 매우 다양했으며, 농장 면적이 아니라 노예 숫자가 중요했습니다. 노예제도는 그것이 실시된 신대륙 및 그 외 지역의 역사를 규정하는 단서가 됩니다. 19세기 들어 프랑스, 영국, 미국,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인들이 노예제도를 폐지한 후, 아시아, 폴리네시아 섬, 지중해 국가들에게 설탕 노동자를 유입하면서 설탕 생산국들의 민족 구성에는 지울 수 없는 혼혈의 피가 남게 되었습니다.
설탕 1톤을 생산할 때마다 아프리카인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추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17세기 유럽과 북미의 설탕 가격이 급락한 원인은 엄청난 작업 규모였으며 설탕은 대다수 사람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흔한 상품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정제 과정은 대개 연료와 인력 공급이 더 쉬운 공급이 이외 지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영국인들은 심지어 설탕 일부를 설탕 생산지인 식민지에 재수출하기도 했습니다.
사탕수수 재배에 필요한 기본 요건은 그대로지만, 생산 과정은 지난 세기를 거치며 달라졌습니다. 사탕수수 수확은 이제 기계가 하기 때문에 평지가 선호되며 사탕수수 압착과 즙 추출도 대부분 기계화되었습니다. 버리는 것도 거의 없습니다. 사탕수수를 처음 끓인 후 남는 잔여물인 당밀은 요리에 사용되거나 증류하여 럼으로 만듭니다. 설탕을 증류하면 알코올과 바이오 연료를 만들 수 있고, 다른 생산품으로는 화학물질, 비료, 동물사료 등이 있습니다. 현재 사탕수수 생산국은 브라질과 인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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